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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물/도시문화의 이해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서평 쓰기

by 김통렬 2021. 2. 25.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서평 쓰기

– 청년의 딜레마와 소비 세태, 그리고 불안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오늘날 밀레니얼 세대의 모습을 이토록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관통하는 어구가 있을까. 언제나 밝고 화려하고 희망에 찬 인스타그램 속 청년들, 우리들의 모습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인스타그램 속에서 우리들은, 연인과 함께 ‘뜨는’ 거리의 핫한 카페를 찾고, 로맨틱한 루프탑에서 맥주를 마시며 종종 하루 숙박이 수십만 원에 달하는 화려한 곳으로 호캉스를 떠난다. 그러나 현실 속 청년 세대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들을 가리키는 용례만 달라졌을 뿐, 대개 절망과 포기로 수렴한다. 일반적으로 청년들의 삶이 얼마나 어렵고 또 그로 인해 우울, 좌절, 증오, 혐오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얼마만큼 이들의 공기를 뒤덮었는지 논의된다는 것이다. 대체 이러한 극단적인 간극과 모순은 어떻게 우리들의 일상이 되었을까.

 

 처음에 나는 작가가 본인의 세대, 즉 80년대생부터 2000년대 초반에 출생한 세대까지 어떻게 하나의 밀레니얼 세대로 아우르는 건지 의아했다. 명확한 세대 구분론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한 번도 내가 80년대생들과 같은 세대로 같은 것을 느낀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작가의 근거는 굉장히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과거에 세대 간 구별은 지금보다 촘촘했는데, 이는 인생의 시간순에 따라 그들의 활동이 비교적 명확하게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온라인 환경의 급격한 확산 이후 세대 간의 취향이나 세계관은 보다 광범위하게 뒤섞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러한 온라인 세계가 일찍부터 삶에 뿌리 깊게 영향을 미치고 또 삶의 일부로서 적극적인 활용을 시작한 세대라는 점에서 이들은 ‘밀레니얼’로 함께 묶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개념을 가지고 다시 우리의 간극으로 돌아와 보자. 밀레니얼 세대들의 삶을 가장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온라인상에서의 이미지 과잉이다. 작가는 이를 ‘환각의 이미지’, 그리고 ‘상향 평준화된 이미지’라고 부른다. 우리 세대는 최악의 양극화에 시달리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소위 성공적인 삶, 궤도에 오른 삶, 지향해야 할 삶에 대한 이미지가 지극히 평준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세대라면, 이 시대의 청춘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하는 ‘핫한’ 것들을 향유한다는 점에서 바로 그렇다. 이를테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도심에서 ‘호캉스’를 즐기거나 떠오르는 동네에서의 화려한 저녁, 제주도, 일본, 동남아, 유럽 등지로의 해외여행이 절대적 다수의 청년의 눈앞에서 구체적인 지향점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이 모든 환각적인 이미지는 보드리야르의 시뮬라르크 개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SNS상에서 그칠 줄 모르고 복제되고, 재생산되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이미 원본과 모사물의 구분이 없고 더욱이 현란한 파생 실재들을 생산해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폭발적인 자기 재현이 결국 근대적 주체들 즉 청년들을 현실과 환상의 간극으로 분열시키고 나아가 상향 평준화된 이미지와 그 규범으로 그들을 억압한다는 점에서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위 시뮬라시옹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현시대의 거대한 하이퍼리얼은 청년 개인에게 타인이 누리는 현란한 행복으로 나타나 치명적인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을 선사한다.

 

다음으로 이러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또 하나의 예시로 작가가 든 블루보틀 이야기도 눈여겨볼 만했다. 내 기억을 되짚어보면, 나는 최초의 국내 블루보틀 매장이 성수에서 이미 엄청난 인기를 끈 후에, 블루보틀 신드롬에 대해 알게 됐다. 정말 가히 신드롬이라 해도 무리가 없었다. 그 이후, 우리 동네 근처에 매장이 새로 입점한다는 얘기가 나오더니 인터넷과 SNS에서 사람들은 또 한 번 피 튀기는 레이스를 준비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블루보틀이 제공하는 스페셜티 커피의 기능적 가치의 수십, 수백 배의 물질적, 정신적 비용을 들이고 있었고 이는 우리 사회가 그 어느 때보다 ‘유행하는 이미지’를 갈구하는 이미지 소비의 사회에 도달했음을 알려주는 명백한 징후였다.

 

오늘날 우리는 그 소비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가려내는 데 온 힘을 다할 뿐, 더 이상 누구도 소비 행위 자체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또한, 이 시대는 넘쳐나는 재화와 신상품을 계속해서 소비해야 하는 생산물 과잉의 시대이다. 그런데 단일 재화의 소비를 넘어서서, 집단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련의 명품 아이템 등을 구입하는 파노플리 효과나 블루보틀의 경우처럼 그저 주류 문화의 이미지에 닿으려는 소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보드리야르는 이를 ‘소비 이미지’에 대한 소비라고 칭한다. 블루보틀 커피만을 마시고 싶은 것이 아니라, 블루보틀 커피와 모든 부차적인 과정에 씌워지는 이미지를 소유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남들과의 ‘차이’에 대한 욕구에서 시작한 이 끊임없는 이미지의 추구는 결국 다수에게 집단적 경쟁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통해 서로의 이미지가 평준화되기 시작하여 욕구는 결코 채워질 수 없게 된다. 작가는 이 욕구를 이미지에 대한 ‘즉각적인 접촉의 욕망’으로 표현하며 ‘블루보틀 현상’은 앞으로 더 빈번하게 핵심적으로 일어나리라 전망한다. 이는 아무래도 당연한 일인데, 이런 삶이 그 자체로 좋다거나 나쁘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고 밝힌 작가와는 달리 나는 이러한 공허한 이미지들에 대한 열망이 우리 세상에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낼 수 있을지는 심히 회의적이다. 오히려 이미 너무도 높게 솟아올라 사회를 덮친 이 물결이 앞으로 어떤 부작용들을 더 일으킬지가 우려된다.

 

책의 1부 환각의 세대에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학생으로서, 절대적인 공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다음 파트는 P. 74 ‘우리는 노력을 조롱하는가’ 챕터에 자리했다.

 

   P. 74 “흔히 근래 청년세대는 노력을 ‘노오력’이라고 조롱하고 세상이 온통 ‘수저’로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회의주의에 빠져 있다고 진단     하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청년들이 소비하는 것이라고는 유튜브의 먹방이나 자극적인 콘텐츠들에 불과하고, 소비생활은 욜로나 탕진잼으로 사치스러워졌고, 미래에 대해서는 포기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묘사에 따르면, 청년세대는 더 이상 노력의 가치를 모르며 노력하지 않고 하루하루 생각 없이 소비생활만 누리는 한량들, 회의주의자들, 냉소주의자들인 것만 같다.”[1]

 

청년 세대를 진단하는 위 같은 관점은 나에겐 모르긴 몰라도 정말 갑갑한 소리로 들린다. 이는 단면적일뿐더러 지극히 근시안적인 묘사로 표면적인 청년의 모습 뒤의 그 인과관계는 전혀 관심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와는 별개로 시대는 변했고 대학교에서의 풍경 역시 많이도 변했다. 오늘날 상당수의 대학생들은 그저 도태되지 않으려고, 남들에게 밟히지 않으려고 발버둥 쳐야만 한다. 학점관리는 물론이고 공인영어점수, 자격증이나 인턴 경력, 대외활동 등 모두 끝없이 이어지는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대학생 청춘’들이 매달리는 것들이다. 실제로 나 또한 경험하고 있고, 주변 어디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 부모님과 선생님들이 주로 하시는 대학교만 붙으면 모든 게 잘될 거라는 말은 거짓말이란 걸 이제 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학년 때부터 정말 대다수의 동기들이 시험 기간 내내 밤을 새는 모습, 그리고 나 또한 어느새 지쳐가는 모습에 어딘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때문에 내가 확언할 수 있는 건, 청년들이 노력을 ‘노오력’이라며 웃는 것은 그저 노력의 가치를 조롱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안간힘을 써도 쉽지 않음을 알면서도 노력할 수밖에 없는 본인들에 대한 자조적인 웃음이다. 작가의 말처럼 투정에 가까운 셈이다. ‘수저’론으로 귀결된다는 회의주의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지적하는 데에서 출발하여 오히려 그들은 그만큼 배로 애를 써서 노력한다.

 

어쩌면 이들이 노력의 가치와 그 가능성에 대해서 이토록 회의하고 냉소로 일관하면서도 그 한줄기 끈을 놓을 수 없는 이유 또한 앞서 논의한 환각의 이미지와 그들의 딜레마에서 오는 걸지도 모른다. N포 세대는 미래를 전부 포기한 게 아니다. 다만 지금 이 사회에 만연하고 또 직접적으로 주입되는 그런 순간순간의 이미지에 도달하기 위해 결혼, 출산과 같은 전통적 가치들을 하나씩 미루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노력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회의주의도 회의주의에만 머무른다면 그 순간 모든 걸 포기하는 셈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포기는 즉, 이미 매 순간 그 가치를 강화하고 공고히 하는 이미지에 대한 배반이자 탈선이며 이는 곧 사회에서의 배제를 의미한다. 아니 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굳게 믿는다. 따라서 불안에 휩싸인 사람들의 갈망은 계속될 것이고 이는 갖은 형태의 노력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미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이런 불안과 강박은 청년들의 사고회로를 스멀스멀 장악하여 그들의 행동 양식을 규정한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나는 이 불안을 재수를 하고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잘 느끼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해야 할 일들을 회피했고 미래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어느 새부턴가, 이번 학기에 이 수업들을 듣지 않으면, 이번 과제, 시험에 만점을 받지 않으면, 이때 군대에 가지 않으면 정말 인생 전체가 망가질 것 같은 그런 불안들이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는 하나하나의 선택과 실수, 결과가 내 앞길을 통째로 망가뜨릴 것 같은 위협감이다. 다만 이 위협감을 나만 느끼는 게 아니라 우리 세대 전반적으로 심화되는 것 같아 순간 안도하면서도 씁쓸하다.

 

그래서 이 책이 가진 강점은 결국 위로라는 키워드에 있는 것 같다. 여느 자기계발서나 유행하는 힐링 서적처럼 위로의 말을 직접 던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딛고 살아가야 할 이 현실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증언함으로써 오히려 큰 울림을 불러일으킨다. 2부와 3부로 넘어가면서, 작가가 하는 모든 말에 공감하고 동의할 순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작가는 자신의 진실을 얘기하고 있다. 우리가 듣고 싶어 할 만한 얘기도, 필요 이상으로 자극적인 얘기도, 혁명적인 얘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자신이 목도한 우리네 삶과 사회에 대해 가감 없이 얘기하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온당함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작가는 평소와 다르게 이 글들은 써야만 한다는 의무감 속에 써냈다고 하는데 그와 흡사한 의무감을 우리도 가져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불안 속에서도, 범람하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도 한 발짝 멈추어 서서 우리가 처한 현실을 바라보고 나아가 그 안의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야 한다. 오직 진실을 통해서만, 서로를 이해하고 이 혼돈을 잠재울 수 있다.

 


[1] 정지우,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한겨례출판, 2020,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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